24회 서울장애인인권영화제 초청작
네 개의 벽(These four walls)
브랜든 드푸어트(Branden DeFoort ) | 다큐(캐나다) | 2024년 | 110분
시놉시스
캐나다의 '매니토바'라는 도시에는 '매니토바 발달 센터'라는 발달장애인 거주시설이 있었습니다. 이 영화는 아주 오래전에 만들어진 '매니토바 발달센터'에서 일어난 일들을 알려 줍니다. 탈시설한 발달장애인들은 시설에서 겪었던 고통스러웠던 학대에 대해 직접 말합니다. 그런데 발달장애인은 왜 거주시설에서 살아야 했을까요? 나라에서 장애인은 '쓸모없다'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었습니다. 탈시설한 발달장애인들은 이것은 차별이라고 말합니다. 장애인 권리를 위해 일하는 활동가들과 탈시설 장애인, 그리고 가족들은 매니토바 발달 센터 같은 거주시설은 없애야 한다고 정부에게 강하게 요구합니다. 다른 발달장애인이 자신이 겪었던 학대와 차별을 받지 않아야 하니까요. 이들은 포기하지 않고 계속 매니토바 발달 센터를 없애기 위해 노력합니다. 과연, 매니토바 발달 센터는 없어졌을까요?
인권평
- 민아영(24회 서울장애인인권영화제 집행위원장)
벽 안의 세계, 벽 밖의 질문
거주시설을 옹호하는 목소리는 이렇게 시작된다.
"그 사람들은 전문적인 돌봄이 필요해요. 가족이 감당할 수 없잖아요."
"사회에 나오면 위험할 수 있어요. 본인을 위해서도요."
이 말들은 배려하는 것처럼, 현실적인 것처럼, 때로는 사랑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이 문장들 안에는 불편한 전제가 숨어 있다. 장애인의 삶은 사회 바깥에서 ‘관리’ 된다는 점이다. 그 분리는 가족도, 당사자에게도 안전하고 현실적이라는 것이다. 이 전제가 얼마나 깊이 우리 사회에 뿌리내리고 있는지는, 한국에서 잇따라 터진 거주시설 사건들이 날카롭게 증명한다. 2025년 인천 강화의 중증장애인 거주시설 색동원에서는 장애여성 거주인 17명 중 13명이 성폭력 피해자로 확인되는 충격적인 사실이 드러났다. 2024년 울산 태연재활원에서는 직원 21명이 거주인 29명을 상습적으로 신체적·정서적으로 학대한 사실이 밝혀졌다. 그러나 이는 특정 시설만의 일탈이거나 특수한 상황이 아니다. 포털 사이트에 '장애인거주시설', '학대'만 검색하더라도 매년 빠짐없이 일어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더욱 잔혹한 사실은 이러한 사건들이 반복해서 드러나도 "그래도 시설은 필요하다"는 인식이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시설은 단순히 공간이 아니라 사고의 방식이다.”
피플퍼스트 캐나다의 창립 멤버 패트릭 워스가 남긴 이 말은, 다큐멘터리 <네 개의 벽>이 말하고자하는 주제를 한마디로 축약한다. <네 개의 벽>은 캐나다 매니토바 주에 위치한 매니토바 발달센터(이하 매니토바 센터)를 중심으로, 거주시설이라는 제도가 어떻게 탄생하고, 유지되는지를 추적한다. 매니토바 센터의 역사는 1890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이름은 '불치자들의 집(Home for the Incurables)'이었다. 이후 수십 년에 걸쳐 이름은 여러 차례 바뀌지만, 그 본질은 변하지 않았다. 최대 약 1,200명의 발달장애인이 이 공간에 수용되었다. 병동 하나에 30명에서 100명 이상이 함께 생활했고, 개인 소지품이나 사생활은 존재하지 않았다. 1977년에는 병동 화재로 인해 잠겨진 문을 빠져나오지 못한 거주인들이 목숨을 잃었다.
왜 이토록 많은 사람들이 거주시설에 수용되었는가. 다큐는 그 뿌리를 우생학에서 찾는다. 20세기 전반, 전세계가 열광한 우생학은 장애를 '사회적으로 제거되어야 할 결함'으로 규정했다. 장애인은 사회에 기여할 수 없는 존재이며, 사회 발전을 저해한다는 논리가 제도 설계에 깊이 스며들었다. 우생학의 제도적 실현 중 하나가 시설이었다. 기여할 수 없는 존재는 한 곳에 거두어 사회로부터 분리시키는 정책, 이것이 시설의 목적이었다. 비록 우생학이라는 단어가 공식적으로 사라진 이후에도, 그 사고방식은 시설이라는 형태로 지속된다. "전문적 돌봄을 위해서"라는 새로운 언어를 입고.
<네 개의 벽>에서는 시설의 폭력성, 잔혹성에만 초점을 두지 않는다. 핵심은 '피해 생존자'의 시설 이후의 삶이다. 피해생존자의 시설 트라우마, 지역사회의 '시설 중심 사고'에 대한 탈시설 투쟁은 지역사회의 실천적 변화를 만들어낸다. 다만, "그들도 사회에 기여할 수 있어요.", "쓸모 있는 구성원이 될 수 있어요.”, 그러니 함께 삽시다라는 주장은 결국 생산성과 쓸모라는 기준으로 인간의 가치를 평가하는 것으로 비춰질 수 있다. 장애인이든 비장애인이든, 누구도 자신의 존재 가치를 생산성으로 평가할 수 없다. 중요한 것은 쓸모의 증명이 아니라, 지역사회 안에서 서로 연결되어 각자의 속도와 방식으로 삶을 꾸려가는 것이다. <네 개의 벽>은 묻는다. 우리는 왜 누군가를 벽 안에 가두어왔는가. 그리고 그 벽이 허물어진 이후, 우리는 어떤 사회를 함께 만들어갈 것인가. 색동원과 태연재활원의 피해 생존자들이, 그리고 여전히 시설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이 이 질문의 답을 기다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