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회 서울장애인인권영화제 상영작
선정작
떨리는 손_우리들의 참정권 이야기
2026 | 다큐 | 38분 26초 | 추병진
배리어프리 ⭕
시놉시스
연지와 지은은 피플퍼스트 활동가이다. 2025년 대통령 선거가 있는 날, 피플퍼스트 활동가들은 발달장애인 참정권 보장을 요구하는 기자회견을 마치고 투표를 하러 간다. 그러나 투표소 직원은 발달장애가 있는 것만으로는 투표 보조를 받을 수 없다는 말을 되풀이하며 투표 보조를 거부한다. 화가 난 연지는 투표소를 빠져나오고, 지은은 투표소 밖에서 울음을 터뜨린다. 투표할 권리를 보장받지 못한 두 사람은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하며 발달장애인을 차별하는 선거 제도에 맞서기 시작한다.
인권평
- 지희경(24회 서울장애인인권영화제 집행위원)
피플퍼스트가 말하는 '나'와 '너'를 위한 정치
한국에선 아무리 가까운 친구, 가족이라 해도 금기시 되는 주제가 있다. 바로 '정치'다. 선거가 가까운 시기에 명절이 되면 밥상에 슬며시 올라오는 정치 이야기. 불이 붙으면 뜨겁게 논쟁을 하다가, 찬물 같은 한마디가 끼어든다. '어린 것이/여자가 뭘 안다고'. 밥상은 차갑게 식는다. 그때부턴 논쟁이 아닌 싸움이 된다. '힘이 약한', '통제하기 쉽다'고 여겨진 사람은 '뭘 모르고 떠드는 어리석은/되바라진 사람'이 된다. 대체 '무엇'을 알고, '무엇'을 모른다는 걸까?
다큐멘터리 <떨리는 손, 우리들의 참정권 이야기>는 그 '무엇'에 맞서는 이야기다. 안개처럼 잡히지 않고 설명되지 않는 '무엇'의 권력에 맞서는 발달장애인권익옹호단체 피플퍼스트 성북센터 동료들의 이야기. '너네가 뭘 안다고' 으스대는 사회에 발달장애인들은 '잘 모르면 쉽게 설명해라! 나의 선택은 나의 것이다!'라고 따끔하게 외친다. 21대 대통령선거가 있던 2025년 6월, 피플퍼스트 동료들은 발달장애인의 참정권 보장을 외치는 기자회견을 마치고 사전 투표소를 향한다. 선거관리위원회 직원은 '발달장애'만으로는 투표 보조인을 제공할 수 없다며 지은의 요청을 거부한다. '손이 떨려야 가능하다'는 선거 매뉴얼에 적힌 그대로 말만 되풀이할 뿐이다. 얼어붙은 지은 곁에서 동료 연지는 강하게 문제를 제기한다. "나의 동료가 고개 숙이게" 만드는 차별적 상황에 화가 났다는 연지의 말은 그저 동료를 위하는 말만은 아니다. "내가 필요한 존재인가?"라 생각했던 지은의 질문은 지은만의 것이 아닌, 발달장애인 동료들이 함께 겪어온 무력감이기 때문이다.
이 다큐는 피플퍼스트 성북센터와 깊게 관계를 맺어가고 있는 추병진 감독의 두 번째 작업이다. 이번 영화는 발달장애인의 참정권 이슈를 중심에 두고 있으며, 이를 이끌어가는 것은 피플퍼스트의 활동가 연지와 지은이다. 이제 막 활동을 시작하며 차별을 알아가고 마주하게 된 지은 곁에서, 연지는 익숙한 슬픔에 빠지지 않도록 그를 지킨다. 두 사람의 관계를 담은 장면들에서는 추병진 감독의 위치와 거리에 대한 감각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광화문 옆 작은 공원에서 서로의 손을 잡고 위로하는 두 사람을 카메라로 담으면 그 온전한 시간을 방해할까 봐, 감독은 나란히 앉아 대화 소리를 중심으로 장면을 채운다. 이 순간을 기록하고 싶은 욕망과, 두 사람이 이 순간을 온전히 경험하길 바라는 동료의 마음 사이에서 갈등이 느껴지는 장면이다. 추병진 감독은 이렇듯 동료와 관찰자 사이를 오가며 피플퍼스트의 운동과 사람들을 기록한다. 감독의 긴 호흡의 편집은 얼핏 지루하게 느낄 수 있는데, 그 현장 안에 있는 한 사람 한 사람의 모습을 보기를 권한다. 같은 현장 안에서도 각기 개성을 드러내는 동료들을 볼 수 있다. 이 점에서 피플퍼스트의 면면을 한 땀 한 땀 기록하고 싶은 감독의 애정이 느껴진다.
'뭘 안다고'라는 말은 언제나 힘 있는 자의 언어였다. 그러나 지은과 연지는 묻는다. 쉽게 설명해주지 않으면서, 접근할 수 없는 투표 환경을 만들어 놓고서, 대체 누가 누구에게 모른다고 말할 수 있냐고. 연지는 지은의 손을 잡고, 지은은 연지의 곁에서 다시 고개를 든다. 차별을 만든 쪽이 아니라, 차별을 겪은 쪽이 더 잘 알고 있는 것들이 있다. 내가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무엇이 나를 고개 숙이게 만드는지. 그것을 아는 사람들이 서로의 곁에서 목소리를 내는 것—그것이 피플퍼스트가 증명한 정치의 언어다.
말을 걸다 鬼
2025 | 극 | 17분 44초 | 이승환
배리어프리 ⭕
시놉시스
한 장애인이 휠체어에서 생활하던 중, 가족과 사회, 제도의 방치 속에서 착취당하고 학대당한 끝에, 필사적으로 모아둔 자신의 수급비마저 사기당하고 세상을 떠난다. 그는 누구에게도 기억되지 못한 채로 건물 옥상에서 스스로 몸을 던졌고 이후 그 건물에서 ‘휠체어 귀신’이 출몰한다는 괴소문이 퍼진다. 그리고 경비원도 입주기업도 나가 버린다. 건물주는 귀신도 돈을 내야 입주시키는 사람이다. 펄펄 뛴다.
괴소문을 듣고 가장 먼저 나타난 건 유튜버다. 그러나 그는 방송도 못하고 귀신의 정체에 접근하지도 못한 채, 공포로 도주한다. 그 후, 건물주는 경찰, 무속인을 불러 귀신을 퇴치하려 하지만 모두 실패한다. 그 귀는 일반 귀신이 아니었다. 장애라는 정체성과 함께한 귀, 우리 사회에서 말할 수 없고 들리지 않던 존재가 공포와 함께 나타났다. 그제야 장애를 지닌 무당이 등장하고, 귀의 말을 이해한다. 이 귀는 단지 한 개인의 원혼이 아니다. 가난과 혐오, 행정 폭력, 제도의 사각에서 죽어간 이들의 집단적 기억이자 분노였다. 점점 더 시간이 지날수록 강해질 수 있다. 장애인 무당은 귀의 생전 시절의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 장애인복지센터를 찾는다. 그곳에서 귀의 정체에 대해 알게 된다. 슬픔과 분노··· 센터소장과 무당은 장애 귀를 달래며 봉인한다. 그리고 무당은 사회적 기업 대표이자 건물주 아내(장애귀를 사기친 사회적기업대표)의 집 앞에서 마지막 의식을 펼친다. 이제 귀는, 스스로의 목소리로 사람들에게 말을 걸기 시작한다.
인권평
- 이정한(24회 서울장애인인권영화제 집행위원)
"세상에, 귀신이 나온대"
어느 상가, 경비원은 도망가고 세입자는 계약을 해지하고 떠난다. 귀신이 나타난다는 소문 때문이다. 각시귀신도 몽달귀신도 아닌 휠체어 귀신이. 건물주는 어떤 놈이 장난을 치고 있는 거라며 푸념한다. 그는 삐뚤게 놓인 소화기를 바로 세운다. 조회수를 높이려는 유튜버도 오고 건물에 숨어 있는 사람은 없는지 순찰하는 경찰관도 오지만 괴이하게 놓인 휠체어를 보며 도망친다. 사건의 진실을 파헤치기보다 단지 대중적 가십으로 소비하려는 이도, 공권력이라 자처하며 자본가의 심부름꾼이 된 이도 귀신을 쫓기는커녕 되려 자신이 쫓겨난다. 결국 건물주는 박수무당을 고용한다. 귀신의 존재보다 세입자의 무존재가 더 무서운 법, 건물주는 돈을 벌기 위해 돈을 아껴 가며 무당을 고용한다. 용한 그 무당의 진단은 '장애귀'다. 그 장애귀의 사연은 이렇다. 어려서부터 집에서 학대받던 장애 소년은 가출한 뒤 지역을 옮겨 독립한다. 홀로 살기 위해 사회적기업에 취업했지만 그 기업은 취약한 장애인들의 수급비를 노린 사기 집단이었고, 결국 적은 재산조차 사기 집단에게 빼앗긴 장애 소년은 좌절 속에 투신해 자살하고 장애귀가 되었다는 것이 사건의 전말이다.
장애귀의 사연, 우리의 사연
무당은 귀신을 진단하고는 그 건물의 장애인자립생활센터에서 상담한다. 그것은 귀신의 사연을 이해하고자 했기 때문이겠다. 그 장애귀의 사연을 깨달은 무당과 센터장은 함께 위령의 굿을 진행한다. 차별과 박해 속에 살다 요절한 장애인의 한을 풀기 위해 분투하지만, 무당은 곧 의식을 잃는다. 그러나 그 위급한 상황 속에서 센터장은 힘겹게 기어가 휠체어를 쓰다듬으며 말한다. "너의 분노와 슬픔은 우리의 것이야. 우리가 풀어 줄게." 센터장의 진심 어린 마음 덕이었을까, 장애귀를 위로하는 데 성공한 듯 더는 건물에 귀신이 나타나지 않는다. 매일같이 건물에 등장해 무작위로 사람을 괴롭히던 장애귀는, 그 연대의 접촉으로 사라진다. 아니 사라진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것으로 이야기는 끝나지 않는다. 모두 평화를 되찾은 것 같은 날, 곧게 서 있는 소화기를 다시 만지며 건물주는 이제 다시 돈을 벌 수 있겠다며 만족한 웃음을 터트린다.
복수의 대상?
돈만 아는 건물주의 집일지 학대 가해 원가정의 집일지 모를 현관 앞에서 박수무당이 장애귀의 '해방'을 선언하니 다음날 그 집에서 어떤 복수의 사고가 일어나고, 영화는 그렇게 끝난다. 장애인의 차별에 대한 응징, 그리고 복수. 그 복수는 건물주였을지 원가정의 집이었을지, 혹은 누군가의 집일지 모르는 곳에서 이뤄졌다. 어딘지 모른다는 점에서 이 복수는 개인 대 개인의 관계에서 벌어진 사적 차별에 대한 사적 복수가 아니다. 장애귀가 겪었던 일들을 보자. 친족 가정의 학대, 자립의 시도, 장애인을 노린 '사회적 기업'의 사기, 죽음 이후에조차 놓일 곳 없는 무연고, 공적 공간에서의 거부⋯. 이것은 어떤 개인의 특별한 사건이 아니다. 여전히 300만 한국 장애인들이 일상적으로 겪고 있는 평범한 사건들이다. 자립을 가로막는 것은 구조의 문제인 동시에 그 구조에 복무하고 있는 이들 때문이 아닌가? "월세 안 내는 귀신 때문에 식겁했다"는 건물주의 말처럼, 탄압과 차별은 오직 자신의 안위만을 걱정하는 이들에 의해 재생산되고 있다. 그렇게 이 영화는 폭력과 차별 구조 속에 위치한 주변인들에게 관해 이야기하고 있다.
말을 걸다
유령이 배회하고 있다, 장애인이라는 유령이. 자본(건물주)과 공권력(순찰관) 앞에, 공익이라 내세우며 장애인을 배반하는 사회적 기업과 가면을 쓴 채 가십 거리로 격하시키려는 유튜버들 앞에, '귀신'이 출몰하고 있다. 공용 화장실에서, 계단에 걸린 채로, 텅 빈 복도에 등장하는 휠체어는 그 자체로 '있어서는 안 되는 존재'에 대한 함의를 전하고 있다. 그저 거주시설에, 그저 방구석에 처박혀 있어야 했던 존재였기 때문에 공적 공간에 출몰하는 자체로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장애인들은 '귀신'이라도 된 양 취급받고 있다. 그러나 그 장애귀는 (‘복수‘가 시작되기 전까지는) 그 누구에게도 해를 가하지 않았고 단지 '등장'했을 뿐이다. 귀신의 출몰에 자본과 권력과 제도는 질서의 혼란을 두려워하지만, 비문명적인 무당과 무능력하다고 여겨진 중증장애인만이 진실을 알아본다.
그래서 영화는 '말을 건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희망을 보고 찾아온 이 지역사회, '너'와 '나'의 사적 관계가 있던 것은 아니지만 '너의 차별'을 '나의 일'로 더 함께하지 못했음에 동료 장애인은 자책한다. 영화는 우리가 함께 투쟁해야 함을, 연대의 가치가 더 끈끈하게 형성되어야 함을 분명하게 말한다. 주변인의 상반된 반응을 통해 말 건네기에 어떤 응답을 해야 할지, 우리는 반대로 어떤 말을 걸어야 할지를 보여 주고 있다.
이 영화는 두 개의 '말 걸기'를 다루고 있다. 하나는 상상 못 한 존재가 공적 공간에 출현하며 전하는 투박한 말 걸기 행위다. 허용되지 않던 공간에 등장하여 다급하게 촉구하는 이들의 말 걸기를 어떻게 바라볼 수 있는가에 관한 질문이다. 다른 하나는, 그 다급하고 투박한 등장에 반응하는 말 걸기다. 등장이 야기한 현장의 혼란이 아니라, 그 존재가 가진 서사의 혼란에 직면하는 연대의 말 걸기의 필요를 전하고 있다. 다시 말해, '말 걸기'란 취조가 아닌 경청이며, 경청한 이의 동참을 제안하고 있는 셈이다. 투박하고 낯선 문법의 시도와 도전 이후를 알 수 없다고 말하는 또 하나의 이유는 그 시도가 관계성을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공적 공간에 등장하는 투쟁이라는 그 시도 이후, 우리는 어떤 응답을 할 수 있을까. 뻔한 말로 다시 묻자면, 그렇다면 지금 한국사회는 지하철 승강장과 버스 앞에 들어서는 장애인들의 출몰에 어떻게 응답할 것인가?
말하지 않아도
2025 | 다큐 | 34분 42초 | 신이명
배리어프리 ⭕
시놉시스
2024년 겨울, 성별과 연령, 장애유형이 각기 다른 세 명의 주인공 - 율희(7), 지호(8), 경환(28) - 이 발달운동센터 에블봄[able:봄]에서 ‘나의 AAC’언어치료 프로그램을 시작한다. 웃음이 많고 장난기가 많은 귀염둥이 일곱 살 율희, 차지(CHARGE) 증후군이라는 희귀 질환으로 난청, 삼키기와 호흡곤란, 편마비 등의 증상을 보이지만, 누구보다도 활동적이다. 언어치료실에서 줄곧 집중하지못하는율희. 특수교사 정은 선생님은 고민 끝에 새로운 놀이 수업을 기획한다. 놀이터와 간식을 좋아하는 지호는 자폐 스펙트럼 장애를 가지고 있다. AAC를 쓰면서 문제 행동이 많이 줄었지만 여전히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소리를 지르고 드러누워 떼를 쓰곤 한다. 곧 초등학교 입학을 앞두고 있는 지호를 위해 언어재활사 주한 선생님은 맞춤형 수업을 준비한다. 뇌병변 장애를 가지고 있는 경환은 집에 있는 대부분의 시간을 TV를 보며 누워 지낸다. 발성은 어렵지만 눈을 맞추고 손을들어 올리고소리 없이 입을 벌리며 의사를 표현한다. 그의 언어재활사 지연 선생님은 AAC를 통해 경환이 더 많은 경험을 할 수 있기를 바란다. 함께 새해 계획을 세우는 두사람, 경환은 하고 싶은 일이 너무나 많다. AAC를 통해 조금씩성장해 가는세 사람과 그들의 여정을 함께하는 재활사들, 봄을 맞아 새로운 도전을 준비한다.
인권평
- 홍성훈(24회 서울장애인인권영화제 집행위원)
시간이 꽤 지난 일이지만, 나는 언어장애로 인해 차별을 받은 적이 있다. 대학 입시를 준비하던 때였다. 면접을 앞둔 상황에서 나는 대학 본부에 요청했다. 내가 언어장애가 있으니 면접관들의 질문에 컴퓨터 문서 화면을 띄워 답변하겠다고, 그러니 필요한 지원을 해줬으면 좋겠다고 정중히(괜히!) 요청했다. 그러자 대학 관계자는 굉장히 난색을 표하며 면접 위원회와 논의한 후 알려주겠다고 했다. 잠시 후 다시 걸려 온 전화에 나는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답변의 요지는 간단했다. 우리 대학에서 실시하는 면접이 ‘구술’ 면접인데 나만 구술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면접을 본다면 그건 다른 입시생들과 형평성에 어긋난다고, 그러니 나만 ‘특혜’를 줄 수 없다고 했다.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답변이었다. 분명 나는 언어장애로 인해 마땅히 보장받아야 할 지원을 요청했을 뿐인데, 그것을 특혜로 인식하는 발상은 어디에서 출발한 것인지 알 길이 없었다. 이와 비슷한 답변은 특정 대학뿐 아니라 여러 대학에서 반복되었고, 나는 면접 기회조차 박탈당해 1년 더 입시를 준비해야 했다. 억울함에 인권위에 진정을 넣어봤지만 그것이 차별 행위라는 인권위의 결정이 나왔을 때는 이미 입시 전형이 끝난 뒤였다. 나는 종종 그때를 떠올리곤 하는데, ‘만약에’라는 가정법이 자연스레 붙곤 한다.
‘만약에 그 당시 내가 AAC를 사용해 면접을 봤더라면, 차별을 모면할 수 있었을까?’와 같은 질문이 따라오는데 답변은 썩 유쾌하지 않다. AAC를 사용했다고 한들 면접관들은 내가 말을 적고 재생하기까지 시간을 기다려주었을까? 대학 측은, 나의 소통방식뿐 아니라 비장애인 중심적인 소통방식 외에 다른 모든 것을 거부한 셈이었다. 나는 그 단단하고 치졸한 비장애 중심주의에 치를 떨었다. 장애인자립생활센터에서 활동을 시작한 이후 나는 문자언어뿐 아니라 AAC를 적극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모든 환경을 나에게 맞출 순 없고, 때론 AAC를 이용한 소통방식이 시민들의 주목을 받을 때가 종종 있기 때문이다. AAC를 이용해 지하철, 혹은 길거리에서 발언할 때면 약간 투박한 기계 목소리가 시민들의 이목을 끌 때가 있다. 그건 나만의 운동 전략이다!
<말하지 않아도>는 보완대체의사통기기라고 일컬어지는 AAC를 사용하는 세 명의 장애인 당사자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율희, 지호, 경환님이 그 주인공이다. 이 세 명은 ‘애블:봄’이라는 센터에 다니면서 AAC를 사용하는 법을 익힌다. 옆에는 ‘언어재활사’들이 당사자와 일대일로 소통하며 그들의 일상에 AAC가 잘 정착하기를 조력한다. 그렇다고 그들이 ‘재활’의 관점에서만 세 명을 대하는 것은 아니다. 언어재활사들은 끈기 있게 AAC를 통해 이야기되는 당사자의 말뿐만 아니라 표정이나 행동, 분위기를 읽어내고 조금 더 다양하게 표현하도록 조력한다. 세 명과 각각의 언어재활사들이 눈을 맞추는 광경을 보고 있노라면 조금 뭉클하기까지 하다. 여기에 힘입어 율희, 지호, 경환님은 AAC를 통해 센터에서뿐만 아니라 지역사회에서 사람들과 소통하며 일상을 가꿔 나간다. 이를테면 율희 님은 AAC를 통해 엄마와 언니와 소통하고 지호 님은 치과 진료 후에 감자튀김을 쟁취하는데(?) 성공한다. 경환 님은 언어재활사와 함께 동네 도서관에서 책을 빌린다. 이들의 모습을 보고 있자면 AAC가 단순히 사람과 사람 사이를 이어줄 뿐만 아니라 조금 더 많은 선택지를 가능하게 하고 세계를 풍성하게 해줄 수 있는 도구가 될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영화를 보고 많은 언어장애인들이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었으면, 우리 사회가 좀 더 다양한 소통방식에 열린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어느 철학자의 말처럼, “목소리 없는 자는 없”기 때문이다.
우리의 일 자리
2025 | 극 | 10분 | 최호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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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놉시스
자립생활센터에 처음 출근한 ‘권중’은, ‘차혐호’ 불편시 시장이 장애인 권리 예산을 일방적으로 줄인다는 통보를 받는다. ‘권중’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이 권리중심일자리가 가지는 의미는 무엇일까?
인권평
- 이정한(24회 서울장애인인권영화제 집행위원)
<우리의 일 자리>에서 영화의 재현은 어떻게 변주되고 있는가. 장애인에 관한 영화는 그간 '장애에 대한 재현의 실패'가 문제였다. 각자의 방식으로 장애인을 재현하며, 비장애인 배우의 연기, 비장애인 연출가의 의도 등이 담기며 장애인에 관한 왜곡된 시각이 반영되어 왔다. 이는 장애인인권영화가 저항하는 지점이다. 장애인에 대한 재현에 비장애인의 시선과 관점이 반영될 때 결국 장애인은 어떤 방식으로든-그 영화가 얼마나 인권적인 주제를 다르고 있건 간에-대상으로 위치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에 장애인인권영화의 목표는 바로 그 재현에 대한 물음, 대상적 위치가 아닌 주체적 위치에 설 수 있음을 지향하고 있다.
<우리의 일 자리>는 그 경계 어딘가에 서 있다. 2022년 양천향교역 에스컬레이터의 전동스쿠터 사고부터 시작해 권리중심공공일자리 사업 폐지, 그에 활용되는 정치적 목표에 관해 다루고 있다. 2023-2024년 권리중심공공일자리 폐지 사태, 그리고 이에 대처하는 노동자들의 마음을 담아낸다. 장애인 권리를 에워싼 제도와 일상에 대해,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 기록하고 기억할 수 있을까?
장애에 관한 역사 속에서 장애인 스스로는 어떤 방식으로 소화할 수 있을 것인가. 400명 해직 노동자는 지금도 각자의 방식으로 분투를 이어가고 있다. 누군가는 출근길 지하철 선전전에 매일같이 나간다. 다른 누군가는 복지일자리를 통해 생계수단을 찾았다. 또 다른 이는 취업은 하지 못했고 야학 학생이 되기도 했다. 그리고 어떤 이는 장애인이나 노동자였던 자신의 삶과 이름을 걸고 공적 활동에 참여하고 있다.
<우리의 일 자리>는 곁에서 이 사태를 어떻게 목격하고 소화하고 있는지를 보여 주고 있다. 경기도 권리중심공공일자리 수행 기관의 노동자들은 다달이 국회의사당역에서 장애시민 권리 페스티벌에 참여하며 복직의 기반이 될 제도화 투쟁에 참여하고 있다. 언제든 이 일자리가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속에서, 경기도의 노동자들은 이 탄압의 역사에 관한 짧은 연출극을 통해 참여한다. 목숨을 빼앗길지도 모르고 '모가지'가 잘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은 반복적으로 가닿는다. 그래서, 우리는 왜 권리중심공공일자리 폐지를 다시 반복하여 이야기하는가? 우리는 왜 한 지역의 투쟁에 함께하고 있는가? 우리는 왜 이 일자리에 참여하고 있는가.
다분히 짜여진 연출, 미리 작성된 대사를 낭독해 왔던 <우리의 일 자리> 출연자들은 마지막에 이르러 분명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전한다. 영화 매체를 통해 정치인의 모습을 재현하면서도 자신의 말을 또렷이 전하는 것이다. 나의 욕구, 나의 욕망, 나의 희망, 나의 불안. 그 희망과 불안을 오가며 만든 피켓을 들고 거리를 행진한다. 그곳에 존엄이 있기 때문이다. 이 발언부터는 더 이상 재현이 아니다. 화면은 이제 현실의 자리로, 현장의 자리로 옮겨 간다. 장애인으로서의 자긍심과 그 존엄성을 알리는 권리중심 노동으로써, <우리의 일 자리>는 사건의 재현을 통해 노동의 직접 발화가 전해진다.
'권중'(한유진 노동자 분)은 말한다. "보치아를 하면서 짜릿함을 느낍니다. 공예 수업에선 나만의 작품을 만듭니다. 연극 수업에선 우리의 권리를 말하는 방법을 배우기도 했습니다. 내가 원하는 머리스타일을 하고 미래를 위한 저축도 합니다. 만화책 '윈드브레이커'도 사고 축구 경기도 봅니다. 일자리가 사라진다면 우리는 복지관에서 가만히 앉아서 주는 것만 받으며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이 사사로운 꿈과 같잖은 행복의 무게를 보라. 공예를 배우며 '내가 만든 작품'이 생겼다고 좋아하는 이 더딘 즐거움, 사오십 대가 되어서야 형형색색 머리에 색을 입히는 저 유치함, 몇십만 원 월급을 받아 만화책을 사 보는 그 철없음들을. 교육도 노동도 제대로 할 수 없는 이 비장애중심의 한국사회에서 철저히 배제되어 왔지만, 이 정도의 행복과 즐거움이 가치라고 주장하는 이들이 자기 스스로를 노동자라 칭하고 있다. 우리의 일이 어느 자리에 있는지를 말하고 있다.
한국의 수도 서울에서 장애인노동자 400명은 일자리를 잃었지만, 그래서 다른 곳의 노동자들 역시 자신의 자리가 언제고 꺾이고 사라질 수 있을 것이라 위태로운 불안 속에 살아가지만, 그러나 여전히 더 많은 지역에서 더 많은 노동자들은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우리는 세상을 바꾸는 노동을 하고 있노라고, 일자리 폐지는 삶에 상처를 남겼고, 그러나 이 노동은 결국 다시 돌아올 것이라고. 우리 일의 자리는 장애인자립생활센터와 길거리, 지하철 승강장에서 이뤄지고 있다. 격리와 배제에 맞서는 일의 자리에서, 세상을 바꾸는 노동이 일궈지고 있다.
잘가, 안녕
이현빈 | 극 | 2026 | 29분 58초
배리어프리 ⭕
시놉시스
장애를 이유로 평생 집 안에서 살아온 영아. 영아는 아빠가 자신을 죽일 것이라는 것을 예감합니다. 영아는 고민하기 시작합니다.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을지. 2025 서울장애인인권영화제 선정작 <마루와 내 친구의 결혼식> 제작진의 신작.
인권평
- 홍성훈(24회 서울장애인인권영화제 집행위원)
‘마침내 올 것이 왔다.’ 나는 이 영화를 보며 생각했다. 세상 모든 소리를 덮어버릴 기세로 눈이 쏟아지는 풍경으로 시작되는 영화는 놀랍도록 고요하다. 반면, 그 고요함 속에서 전개되는 이야기는 뜨겁다 못해 데일 것만 같다. 무엇이 보는 이의 마음을 뜨겁게 달구는 것일까? 그것은 아마도 이 영화가 우리가 여태껏 몰랐던, 아니 알고 있어도 실은 모른 척했던 이야기를 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에둘러 가지 않겠다. 이 영화는 아래와 같은 소재를 삼고 있다.
‘장애인 자녀 살해’
이 일곱 자는 무수히 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다. 그러나 이 일곱 자가 기존 미디어에 쓰일 때는 너무도 납작한 틀거리에만 찍혀 나온다. 마치 거기에 허용되는 이야기가 정해져 있는 것처럼 말이다. 장애인 자녀 살해를 다룬 뉴스 기사엔 무엇이 쓰이고 무엇이 가려지는 걸까? 굳이 애쓰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것처럼 기사에는 돌봄으로 인한 부모의 고통이나 자녀를 죽이기까지 인간적 고뇌라는 것이 당혹스러울 정도로 세세하게 기입되어 있다. 한편 생각해 보자. 우리는 살해당한 장애인 당사자의 입장을 들어보았는가? 물론 죽은 자는 말이 없다. 그렇다고 해서 죽임을 당하기 전까지 그가 어떤 삶을 살았고, 어떤 꿈을 꾸었는지 알지 못하리라는 법은 없다. 아니, 정직하게 말해보자. 우리는 어떤 영역에서 의도적으로 알기를 멈춘다. 어떤 한 존재가 분명 거기 있었음에도 말이다. 그렇다고 마냥 장애인 당사자를 피해자의 위치로 두어서도 안 될 것이다. 어떻게 하면 피해자이면서 한때 꿈과 욕망을 가진 사람임을 잊지 않는 법을, 이 복잡한 애도를 수행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잊을 만하면 반복되는 비극을 멈출 수 있을까? <잘가, 안녕>이 어쩌면 열쇠를 제공할 수도 있겠다.
<잘가, 안녕>은 장애인 당사자인 영아의 시점에서 이야기가 진행된다. “나는 아빠와 함께 죽지 않을 방법을 생각하고 있어요”라는 영아의 첫 대사는 이 영화가 영아의 시선에서 전개될 것을 선언하는 셈이다. 영아는 아버지와 살고 있다. 둘은 거리를 두며 지내는데 영아는 주로 방에서, 아버지는 주방에서 많은 시간을 보낸다. 둘 사이의 거리는 얼마 되지 않지만 소통은 끊겨 있다. 아버지는 어떤 이유로 인해 빚을 지게 되었고, 함께 밥을 먹고 서로의 일상을 나누는 주방 식탁에 앉아 유서를 쓴다. 영아는 그런 아버지를 물끄러미 바라보는데 아버지가 자신과 함께 생을 마감하기 위해 어떤 준비를 하고 있음을 예감한다. 영아의 예감은 어느 날 벼락처럼 찾아온 것이 아니다. 그것은 흙탕물 속에 있는 부유물처럼 차곡차곡 쌓인 기시감이 만들어낸 징후 같은 것이었다.
본인이 떠나면 남겨진 영아가 힘들 것이라는 슬프고도 독단으로 가득 차 있는 판단은 영아의 어머니도 한 바 있다. 어머니는 몇 년 전, 암으로 죽음을 맞았는데 병원에 입원하기 전 영아에게 했던 말─“영아야, 엄마 이제 곧 죽어. 아빠도 죽는다. 너는 혼자 살아나가야 해. 가끔 너를 박살내는 사람들이 있을 거야. 사람들은 원래 그렇게 나빠. 고통도 지나가는 거니까 받아들여.”─은 남겨질 영아의 삶을 비관적으로 전망할 뿐이었다. 영아는 본인의 삶을 언제나 비극으로만 바라보는 엄마, 아빠에게 ‘변수’가 되고 싶어 한다.
아버지의 결단만 남겨둔 상황에서 영아가 무기력하게만 있는 것은 아니다. 활동지원사 정민과 함께 부단히 삶을 이어 나가며, 언제 있을지 모를 아버지의 살해 시도에 맞설 호신술을 연습한다. 영아는 아버지에게서 죽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이윽고 아버지는 실행에 옮기는데, 영아를 직접 살해하는 것이 아닌 집안에 가스를 누출하면서 본인과 영아가 서서히 죽어가는 방법을 택한다. 잠에서 깬 영아는 생애 모든 노력을 기울여 집에서 탈출하는 데 성공하고 살아남는다. 하지만 스스로 생을 포기한 아버지는 끝내 숨을 거둔다. 살아남은 영아는 다음날 집으로 찾아온 활동지원사 정민과 아버지의 시신을 어떻게 할지 이야기를 나눈다. 영아는 경찰에 신고하는 일만큼은 꺼리는데, 이유는 아빠의 살해 시도에서 살아남은 일이 세상에 알려지면 본인이 그저 ‘불쌍한 존재’로만 이야기될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영아는 이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전복적인 시도를 한다. 활동지원사와 함께 아버지의 시신을 휠체어에 태워 절벽에 다다르고, 본인의 방식대로 ‘놓아준다.’ 다시 말해 절벽 끝에서 아버지를 바다로 밀어 넣으며, 영아는 세상이 규정하는 '피해자'라는 틀을 벗어던진 셈이다.
아마 이 영화를 본 관객들은 마지막 장면을 보고 어떤 표정을 지을지 난감할 것이다. 나 역시 한참을 멈춰 있었다. 다만 이 말만은 하고 싶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 비춰진 영아의 결심 굳은 표정을 오래도록 잊지 말아 달라고, 그 어떤 경우에도 사회적으로 ‘용인되는’ 죽음은 없다고.
함께 먹자 밥!
2025 | 다큐 | 26분 52초 | 조상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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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놉시스
1. 서러운 밥상 : 학생 90% 이상이 중증장애인인 노들장애인야학. 밥과 숟가락이 있다고 먹을 수 있는 게 아니다. 누군가는 미안하고, 누군가는 서럽고, 누군가는 지쳤을 밥. 함께 먹는 밥에 대한 궁리를 시작한다.
2. 평범한 밥상 : 법적 근거가 없다는 이유로 서울시와 교육청의 지원은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급식 비 마련’ 후원행사를 열어 기금을 모아 급식을 시작했다. 2016년, 학생 밥값 0원. 무상급식이 시작됐다.
3. 평등한 밥상 : 반찬을 보며 돌아서는 비건인들이 눈에 들어온다. 세상의 온갖 ‘턱’들로 인해 서러웠던 밥상을 기억하며 식단의 턱을 없애기 위해 비건국과 비건 반찬을 밥상에 올려 함께 먹기 위한 식탁의 크기를 넓혀간다
인권평
- 서한영교 (24회 서울장애인인권영화제 집행위원)
세계의 밥을 짓는 기술
“밥 먹었어요?” 라는 말이 금기어였던 학교가 있다. 장애인활동지원시간이 없고, 돈도 없어서 “굶는게 너무 일상적이고, 그냥 안 먹는게 너무 익숙해진” 학생들이 다니는 학교가 있다. 쫄쫄 굶고 있는 학생들을 두고 “그냥 밥 먹는게, 죄 짓는 느낌이” 들어 차라리 굶는 편을 선택했던 비장애인 교사들이 다니는 학교가 있다. 학생들에게 식사지원 요청을 받을까봐 날쌘 걸음으로 못 본채 지나가며 숨어서 밥을 먹던 활동가들이 일하던 학교가 있다. “밥 먹었어요?” 이 흔한 한마디에 서러움과 버거움, 미움과 미안함이 잔뜩 묻어나 있는 학교, 바로, 노들장애인야학이다. 조상지 감독의 영화 <함께 먹자, 밥!>은 노들장애인야학의 평등한 밥상을 만들어온 시간들에 바치는 러브레터 같은 영화다.
-학교 이전에 세계
비장애인들에게는 지나치게 당연한 것들이 장애인들에겐 특별한 것, 간절한 것이 되기도 한다. 그 목록 중 하나가 ‘학교’다. 중증뇌병변장애인 조상지 감독은 스스로 ”학교를 못 가는게 당연하다고 생각”했고, “주변의 누구도 내가 학교를 갈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학교에 다녀본 적 없던 조상지 감독이 다 커서 도착한 학교는 “꿈에서도 상상해보지 못한 새로운 세계”였다. 그 새로운 세계란, ”전동 휠체어를 타고 혼자 이동하고, 공부하며, 친구들과 함께 밥을 먹으면서 수다를 떠는 많은 장애인들“이 있는 학교였다. 비장애인들에게 너무나도 당연한 이동하고, 공부하고, 함께 밥 먹고, 수다 떠는 풍경이 있는 ”새로운 세계“를 기초짓는 ‘평범한 밥상’ 대한 경이로움에서 영화는 출발한다.
-없는 세계를 짓는 기술
<함께 먹자, 밥!>은 학교 없는 곳에서 만들어진 학교를 만들기 위해 노들장애인야학은 새로운 세계-짓기(worlding)를 따라간다. 노들야학의 26년차 교사 한혜선은 영화에서 말한다. “지금 준비가 안됐어, 어쩔 수 없어, 준비를 우리가 다 하고 나서 하는 게 아니라. 필요해? 이거 있어야 되잖아! 이거 해야 되잖아! 하면 우선은 시작을 했던 같아요. 그리고 권리로서 이거는 당연히 이 사회에서 해야 되는데, 그럼 싸우기도 했고, 투쟁도”하며 학교 없는 곳에서 학교를 만들기 위해 먼저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야 했다.
-1단 시작하기, 2단 투쟁하기, 3단 버티기, 4단 잇기
“학교다니는 건 재미있지, 집에 가기는 싫지, 근데 배는 고프지”, 근데 돈은 없지, 활동지원시간이 없는 학생들과 교사들은 지원도 없고 아무것도 없었지만 “밥 못 먹는 사람 없고, 서러운 사람 없게 무조건 그냥 일단” 급식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학교 화장실 옆에 딸린 2평 남짓한 작은 휴게공간에 주방을 차렸다. 급식이 시작되자, “너무 좋아서, 밥을 두 그릇 세 그릇”먹었다는 학생, “너무 많이 먹어 배탈”이 났다는 학생들이 속출했다.
매달 운영비에 허덕이면서도 평범한 밥상을 지켜내기 위해 서울시청 앞으로 찾아가 “밥통을 두드리며” 밥 먹을 권리를 요구하며 투쟁했다. 교육청을 찾아가 “너도나도 장애인도 급식”을 외치며 지원을 설득하고, ‘급식 항쟁’이라는 이름으로 무상급식마련을 위한 ‘평등한 밥상’을 위한 후원마당을 열며, 밥상을 차려나갔다.
코로나19 대유행이 시작되고, 밥을 스스로 먹기 어려워 식사지원이 필요한 장애학생들에게 숨 막히는 1인용 세계가 펼쳐졌다. “코로나 시기를 버틸 힘이 없고, 집에 있을 수밖에 없고, 휴교를 했던 2년을 버텨내는” 힘은 그간 투쟁하며 만들어온 밥에서 나왔다. 교사들은 밥 배달에 나섰고, 학생들은 “비로소 내가 살아있다는 걸 확인”해 나갈 수 있었던 힘을 얻을 수 있었던 것도 바로 밥이었다. 누구도 배제되지 않는 ‘세계’를 만들어 나가는 노들장애인야학의 밥은 버텨나갈 수 있는 힘이었다.
‘평등한 밥상’을 향한 힘은 “폭우와 가뭄으로 화재와 태풍으로” 기후재난을 겪고 있는 지구와 그 지구에 거주하고 있는 동물들을 잇기 시작했다. 모든 존재가 평등한 밥상을 지향하며 비건반찬을 늘려나갔고, 일회용품 사용을 줄여나갔다.
평등, “이것만큼은 꼭” 지켜내야 할 0번째 가치로 삼는 노들장애인야학이 차린 평등한 밥상에 깃든, 평등은 힘차다. “평등한 밥상”에 깃든 힘, 그 ‘힘’은 다시 우리를 일단 시작할 수 있는 힘, 다시 투쟁하는 힘, 다시 버텨나가는 힘, 다시 이어나가는 힘으로 “새로운 세계”를 조직하고, 새로운 영화를 찍게 하고, 새로운 언어를 짓게 한다. 조상지 감독은 말한다. “서로 다른 사람이 한 상에 모일 때, 밥은 차별과 고립을 넘어서는 언어가 되고, 차별과 고립을 넘어설 수 있는 언어가 된다.” 그리고 영화는 구호를 외치듯 힘차게 말하며 끝난다.
“함께 먹자, 밥!”
Mapping
2025 | 다큐 | 10분 | 조주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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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놉시스
세진은 소리를 전기 신호로 바꿔주는 인공와우를 통해 세상의 소리를 감각한다. 사람들의 말소리가 발자국 소리와 같게 들렸던 2 채널 보청기에서 채널 48 보청기 인공와우까지, 시간이 흐를수록 들을 수 있게 하는 기술은 발전했지만 인공와우 매핑을 거칠 때마다 세진은 가장 가까운 사람의 목소리조차 다르게 느낀다. "나는 진짜라는 게 지쳤다고 해야 하나 언제까지가 '진짜 소리'랑 제일 가깝냐고.” 주현은 세진이 감각하는 소리가 궁금했지만 이내 그 궁금증은 세진이 듣는 소리가 아닌 사람의 말소리를 잘 들리게 하는 기술을 탑재한, (그리하여 청각 중심의 사회에 편입해야 하는 사용자 목적을 가진 인공와우와) 그 기술의 발전 방향에 대해 의문을 갖는다.
“'진짜소리'라는 게 뭘까. 진짜는 없는 것 같아. 그냥 정상성이 만들어낸 환상 같아.”
인권평
- 지희경(24회 서울장애인인권영화제 집행위원)
청각장애인이 소리를 들을 수 있도록 개발된 의료기기가 인공와우다. 다만 기기의 구조상 진짜 소리와 유사한 소리를 듣기 위해서는 여러 번 조정과정을 거쳐야 한다. 이 조정 과정을 매핑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진짜 소리’란 무엇일까? 청각장애가 없는 사람이 듣는 소리가 진짜 소리일까? 영화 <매핑>은 세진이라는 인물이 매핑과정을 겪으면서 품은 ‘진짜’에 대한 의문으로 채워져 있다.
인간은 자신이 겪은 경험을 바탕으로 현실을 구성한다. 그리고 쉽게 자신의 현실이 다른 모두의 현실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현실은 그것을 경험하는 사람의 수만큼 다양한 것이다. 그런데도 누군가는 (비장애인 중심으로 구성된) 특정한 현실에 자신을 ‘매핑’해야 한다.
세진은 생각한다. ’’나는 진짜라는 게 지쳤다고 해야 하나 언제까지가 ‘진짜 소리’랑 제일 가깝냐고.” 개인으로 하여금 정상성을 향해 나아가도록 강제하는 사회에서 개인은 지칠 수밖에 없다. 매번 자신의 고유한 현실을 부정하도록 요구하기 때문이다. 개인을 부정하는 방식으로 통합되어 온 그동안의 사회는 다양한 낙오자를 만들었다.
정상, 진짜, 순수 같은 단어들이 선호되는 이유는 그 단어들을 사용하여 현실을 구성하면 세계를 보다 쉽게 정의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쉬운 이해’를 경계해야한다. 쉬운 이해는 종종 많은 세부를 누락한 것에 불과하며, 독해의 과정에서 생겨나는 고유한 관점의 가능성을 제한하기 때문이다. ‘진짜 소리’라는 말이 그 범주 밖의 다양한 소리 경험을 지워버리고 그 소리 경험에서만 피어날 수 있는 세상에 대한 관점을 사전에 차단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매핑>은 우리에게 몇몇 이해하기 쉽지 않은 장면들을 제공한다. 이때의 난해함은 관객 안에 ‘진짜’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매핑>만의 고유한 표현이다. 영화 자체가 이해의 차원을 넘어 존재하는 하나의 타자로서 우리 앞에 놓여있는 것 같다. 이미지와 소리, 소리와 의미의 연쇄를 교란시키며 의미 짓기 게임을 거부하는 영화 속 순간들. 관객은 그것을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지만 감각할 수는 있다. 그리고 바로 그 지점에서 <매핑>이라는 타자의 고유성에 설득된다.
“서로의 현실에 접속하려 할수록 자꾸만 미끄러진다.” <매핑>의 후반부에 등장하는 이 말을 통해 이 영화가 제공하는 독특한 감각의 출처를 파악할 수 있다. ‘접속’이라는, 타자의 경험에 닿으려는 공감의 시도는 매번 미끄러지는 식으로 좌절된다. 이 질문은 자신의 경험이 아닌 세진이라는 동료의 매핑 경험을 다룬 감독 개인에게도 중요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완전한 공감의 불가능성을 인정하는 개인들의 연대에 대한 질문으로 확장된다.
‘미끄러짐’이라는 감각은 영화 전반을 관통한다. 흥미로운 점은 영화가 계속 미끄러지면서도 무너지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미끄러지면서도 끝끝내 우리에게 와 닿는다. <매핑>은 “결코 완전히 포개어질 수 없는” 다양한 몸들의 연대에 대한 고민을 동력으로, 미끄러지며 나아가는 영화다.
개막작
두 분의 결혼을 (안)축하합니다
추주식 | 극 | 2025 | 17분 45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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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놉시스
장애를 가진 연인 재헌과 서연은 평범하게 사랑하고, 자연스럽게 결혼을 꿈꾼다. 공원에서 건넨 조심스러운 재헌의 프로포즈의 서연의 대답은 승낙이 아닌 계산으로 이어진다. 결혼을 선택하는 순간, 두 사람은 둘 사이의 사랑의 문제가 아닌 제도의 문제, 가족의 걱정, 사회의 시선과 마주하게 된다. 서연의 어머니는 “결혼을 하면 생계급여가 줄어 들 수 있고, 임대주택 자격에서도 탈락할 수 있다” 라는 현실적인 이유로 결혼을 반대하고, 직장 동료들은 뒷담화로 편견을 쏟아낸다. 재헌의 아버지는 결혼을 인정하면서도 ‘다른 가족들에게는 알리지 말라’는 말과 함께 돈봉투 건네며, 차갑게 현관문을 나선다. 누구도 둘의 사랑을 금지하지 않으면서도 “너희는 결혼하지 않는 편이 낫다” 말한다. 서연과 재헌은 혼인신고서를 앞에 두고 흔들린다. 사랑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사랑을 선택했을 때 감당해야 할 불이익이 명확했기 때문이다. 결국 서연은 혼인신고서를 찢어버린다. 재헌은 자신의 방 깜빡이는 조명 아래서 찢겨진 혼인신고서를 힘겹게 다시 붙인다. 두 사람은 결혼을 포기하지도, 완전히 선택하지도 못한 채 묻는다. “우리가 함께 살겠다는 게, 축하 받지 못할 일일까?”
“왜 우리의 결혼에 더 많은 용기가 필요할까?”
이 작품은 장애인의 결혼이 축하 보다 걱정이 먼저 떠오르는지에 대해 사회제도와 우리 인식에 대한 경고이다.
인권평
- 최한별 (24회 서울장애인인권영화제 집행위원)
저는 꽤 오래 연애를 하다가 결혼을 했습니다. 연애 기간이 길어지다 보니, ‘그냥 연애만 해도 좋은데, 꼭 결혼을 해야할까?’라고 생각을 했었습니다. 그래서 애인에게도 늘 “나는 결혼 절대 안 할거야!”라고 이야기를 하곤 했지요. 하지만....결국 제가 애인에게 반지를 끼워주며 “나와 결혼해줄래~”하고 프로포즈를 했습니다. 제가 갑자기 왜 마음을 바꿨냐고요? ‘이 사람이라면 결혼해도 좋겠다’, ‘앞으로는 이 사람이 내 옆에 있었으면 좋겠다’ 싶었거든요. 마치 영화 속의 재헌처럼요. 두 사람이 서로 사랑을 주고받는 것은 기적같은 일이라고 하죠(짝사랑 전문가들은 아마 동의하실거예요). 그런데 더구나 평생을 서로와 함께하고 싶다는 생각이 두 사람 모두에게 같이 생겨나기까지 하다니, 그건 정말 더더욱 기적같은 일이겠죠. 사랑하는 사람과 평생을 함께하고 싶은 마음, 소소한 일상들을 나누고, 우리만의 농담이 쌓이고, 안 씻어서 꼬질한 모습을 봐도 사랑스럽다는 생각이 드는 나 자신에게 놀라기도 하고, 천천히 서로에게 익숙해지며 “가족”이 되어가고 싶다는 소망. 이 소망을 갖게 된다는 것은 두 사람의 인생에서 매우 의미있는 순간입니다. 그리고 그 소망을 법적으로도 인정받기 위해 “결혼”을 결심하는 것은 아주 큰 마음을 내는 일이죠.
이 큰 결심을 한 사랑스러운 커플, 서연과 재헌은 거대한 벽을 마주합니다. 두 사람이 장애인이기 때문입니다. 수급비 문제, 임대주택 문제와 같은 제도적 문제부터 “장애인끼리 애라도 낳으면 누가 돌보려고”,아직 도움도 많이 필요하면서”같은 주변의 시선들도 두 사람의 마음을 꺾습니다. “사랑하는 게 왜 이렇게 벌 받는 것 같냐”는 재헌과 서연의 한숨을 보고 있기 너무나 괴로웠어요. 비장애인인 제가 결혼을 결정하고 마주했던 벽은 기껏해야 ‘휠체어를 탄 친구들도 오기 편하게 접근가능한 예식장 찾기’, ‘빠듯한 결혼식 일정에 맞춰 사진도 찍고 청첩장도 만들기’ 정도였거든요.
결혼, 왜 비장애인들에겐 기쁘고 설레는 행복인 반면 장애인에겐 “벌”이 되어야 하는 것일까요? 올해로 20주년을 맞은 유엔장애인권리협약 제23조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법적으로 결혼을 할 수 있는 나이에 있는 장애인은 누구든 상대의 자유롭고 완전한 동의를 통해 결혼을 하고 가정을 이룰 수 있는 권리가 인정된다.” 영화를 보니 아무래도 한국 사회는 여전히 이 조항을 지키는 데 실패하고 있는 것 같네요.
서연과 재헌, 두 사람의 사랑은 과연 어디에 도착하게 될까요? 여전히 같은 고민을 가진 장애인들도 듬뿍 축하받으며 행복한 결혼을 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요? 우리는 그 사회를 만들기 위해 뭘 해야 할까요?
폐막작
이기적인 조선동
2025 | 다큐 | 40분 | 황나라
배리어프리 ⭕
시놉시스
중증장애인 조선동은 가평에 있는 장애인거주시설 ‘꽃동네’에서 약 14년 살다가 2021년에 김포로 탈시설했다. 원래 잘 걷고 잘 뛰던 사람이었지만 어느 해부터인가 장애가 심해지더니 나중엔 아예 누워서만 지냈다. 죽으러 갔던 시설에서 노들야학과 김포센터의 지원을 받아 약 14년만에 세상 밖으로 나왔다. 이후 김포시에 있는 자립생활 체험홈에서 자립해서 잘 사는가 싶더니 그는 갑자기 서울로 향한다. 김포에서만 받을 수 있는 24시간 활동지원시간과 체험홈을 버리고 서울로 갔고, 노들야학에 가서 종로구에 살겠노라 선언한다. 영화는, 조선동이 집도 절도 없이 서울시 종로구에 안정적인 일상을 마련하기까지의 과정을 보여준다.
인권평
- 이규식, 이정한(24회 서울장애인인권영화제 집행위원) 박지원(서울장애인인권영화제 사무국장)
고집
가장 먼저 고집이 떠올랐어. 내 고집이 생겨야 끝까지 가지. 다른 사람이 뭐라 하든 쫑알쫑알 하든 내 고집이 있어야, 목표가 있어야 한다. 고집이 없으면 남들이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하잖아. 나는 그래서 조선동이 한편으로는 싸가지 없지만 싸가지 없는 게, 바로 그게 좋다. 싸가지 없지만 내 맘대로, 하고 싶은 대로 다 하고 그래야 장애인이 자기 삶이 좀 편하지 않을까. 이동권도 제대로 안돼 있잖아. 근데 여기 서울 혜화동에 오면 장애인 마음대로 다 할 수 있잖아. 지하철 타고 버스 타고 친구 만나고 하고 싶은 거 다 할 수 있게 가능하지. 조선동은 자기 고집이 있는 거다. 그런 걸 하겠다는 고집. 그게 가장 좋다. 물론 고집 있으면 욕도 많이 먹지. 근데 욕을 많이 먹으면 그게 더, 오히려 더 좋다고 나는 느낀다. 욕도 많이 먹다 보면 자기가 잘못한 걸 깨닫기도 하잖아. 남들이 욕하면 속으로 ‘시팔, 시팔’ 기분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고 그냥 밀고 나갈 수 있어야지. 남들이 나한테 ‘시팔, 시팔’ 한다고 확 삐지고 토라지고 그래서 현장에 안 나오고 하면 결국 자기 스스로한테 도움이 안 되잖아. 근데 조선동은 욕을 먹을 각오가 돼 있다. 내가 바깥에서 보기엔 그렇게 보였다. 만만치 않을 텐데도. 큰 결심을 하고 나오게 됐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조선동 덕분에 한 지역 안에서 활동보조 시간을 만들었잖아. 큰 성과가 됐다. 가만히 있다가 된 게 아니라 싸워서 그렇게 만들었으니까. 그게 내가 보기에 훌륭하다고 생각하는 부분이지.
자원 활동과 조직
조선동이 김포센터를 믿기 때문에 이렇게 나올 수 있었다. 조선동이 자기 혼자 나왔으면 택도 없을 거고. 조선동이 자원 활동가들을 잘 이용했다. 그만큼 자기가 믿고 함께할 사람을 잘 찍은 거다. "따라와라, 도와달라" 할 수 있는 사람들. 그들을 믿었기 때문에 조선동이 여기까지 오지 않았나 생각한다. 김포는 김포대로 센터 안에서 자원활동을 잘 조직했고 그다음에 조선동이 2차전으로 노들야학에 잘 개겼다. 보통 사람들이면 집도 없는 장애인이 온다고 누가 재워. 조선동이 깡다구가 대단하다. 그런 깡다구와 믿는 구석이 없으면 결국 노숙하는 채로 살 텐데, 어떻게 잘 싸바싸바했는진 모르겠지만 아무튼 잘 수 있는 길거리와 차, 노들야학 교실까지 받았으니 아주 잘했다. 조선동이 하나 때문에 여섯 명 활동가가 죽어 가는 정도였지만 조선동 스스로게 잘해준 거, 그게 더 훌륭하다. 조선동이 활동가들한테 개기는 걸 포기하지 않았고, 활동가들도 끝까지 책임진 게, 나는 그게 훌륭한 부분이라 생각한다. 활동가들은 자기도 피곤해 죽겠었을 텐데도 만만치 않은 그 상황에서 끝까지 책임졌잖아. 조선동 고집, 그리고 활동가들이 실질적으로 뒤를 받칠 힘이 있어서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조선동이 앞으로 잘 살았으면 좋겠다. 배신 때리지 말고. 졸라게 힘들었던 활동으로 살았으니 잘 좀 살았으면 좋겠다. 자기 하나 때문에 여러 활동가들이 고생 바가지로 했잖아. 그걸 바라보면서 잘 살아야지. 시설에 가지 않는 자체가 잘 사는 거 아닌가. 이렇게 자립이 어려운 건데 이걸 포기하고 다시 시설에 가면 안 되지. 그땐 진짜 나올 수 없잖아. 시설에는 다시 들어가지 않았으면 좋겠고. 무엇보다 다른 사람들한테 멘토가 됐으면 좋겠다. “여기까지 왔으니까 너희들도 힘을 좀 가져라” 하고 사람들 만들어서 싸우고 하는 게 잘 사는 거 아닌가. 성공해서 여러 활동가들한테 모범과 교훈을 보이고, 앞으로 좀 더 투쟁이 필요할 텐데 꾸준하게 본을 보이면서 활동을 잘했으면 좋겠다.
김포와 노들
김포랑 노들이 엄청 큰 결심을 한 거지. 장애인이 부른다고 김포랑 노들이 왜 나와. 김포랑 노들이 뭐가 있다고 같이해. 근데 뭐가 있는 게 아닌데도 각오하고 조선동이 나오는 걸 지원한 거 아니야. 그렇게 할 때부터 김포와 노들은 책임을 져야 하는 거다. 데리고 나왔으면 책임져야지. 근데 더 중요한 건, 그 책임만 갖고 가면 안 된다. 당사자가 싸울 힘이 생겨야 그만큼 뒷받침을 해주지. 당사자가 멍 때리고 가만있으면 그걸 누가 해줘? 그냥 멀뚱멀뚱 있으면 시설로 보내려고 하겠지. 그래서 나는 조선동이 싸가지 없지만, 그 싸가지 없는 게 오히려 좋지 않나. 여러 활동가들이 그걸 믿었기 때문에 뒷받침한 거지. 김포랑 노들, 조선동 이 셋이 마음이 딱딱 맞았으니까 같이 함께 나간 거다. 누구 하나 삐끗하면 안 되잖아. 그러니까 김포센터는 김포 지역에서 책임지고 노들야학은 서울에서 책임졌다. 물론 자기 삶을 자기가 책임져야 하는데 그걸 책임지게끔 만들어주는 멘토의 역할이 필요하다. 이 싸움에선 김포랑 노들이 멘토 같은 역할이었지. 이제부턴 조선동이 김포와 노들이 했던 걸 기억하고, 앞으로 그렇게 똑같이 멘토의 역할을 해야 된다. 누군가의 믿을 구석이 되는 거.
성과와 과제
조선동 때문에 한 곳은 활동보조 시간을 뚫었잖아. 어디서 그렇게 시간을 많이 줘, 택도 없지. 얘 때문에 몇백 명의 ‘판’을 벌여 놨다. 그런 게 바로 성과 아닌가. 이건 조직적으로 성공이지. 활동지원도 주고 주택 돈을 줬잖아. 그럼 성공이지. 앞으로 조선동 같은 사람이 서울 종로구에 오면, 조선동처럼 활동지원과 집을 받을 수 있을까? 글쎄, 내가 함부로 생각은 어렵지만 목숨 걸고 한다면 가능하지 않을까. 그정도로 싸가지 없으면, 그걸 힘으로 할 수 있으니까. 싸가지 없고 고집 있으면 뒤에서 뒷받침해 줄 사람이 생기지 않을까. 여러 사람들이 같이 해야지. 물론 시설에서 나오는 분도 제대로 못 하는 사람들 많지. 활동보조인이 시키는 대로 하는 경우들이 있으니까. 시설에 있는 거랑 다르지 않아. 그래서 난 조선동 딴 건 다 빼고 고집 있는 게 훌륭하다고 생각해. 활동보조가 시키면 시키는 대로 안 하는 게 우리도 좋고 걔도 좋고. 보통은 시설 살면 보호만 받잖아.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하고. 자기 생각 표현 안 하고. 그게 안 좋다. 원래 그렇게 하면 안 되는데 시설에 살면서 거기에 푹 젖어 갖고. 원래 시설에 보내면 안 되는 건데 시설로만 팍 보내니까 자기 생각이 없어지게 된다. 그게 문제지. 그래서 조금 깨트려줘야 하는데 보통 깨트려 줄 사람도 없고 있어도 시간이 좀 많이 필요하다. 그래서 시설에서 나오면 그분한테 활동가들이 딱 붙어줘야 된다고 나는 생각해. 그러면서 그 활동가가 알려 주고 하면 좋으니까. 나오자마자 아무것도 모르는데 옆에 자기 활동보조 있으니까 좋아라 하면서 활동보조인만 쪼르르 찾지. 자기 도와주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니까. 근데 나는 그게 안 좋다고 생각해. 나는 시설에서 나오면 활동가가 딱 붙어서 활동지원사를 하면서 알려 줘야 된다고 생각해. 그러면서 자기 생각을 충분히 말할 수 있게 함께하면 좋겠다. 시설 밖에 나와도 주변 사람들이 그 사람을 주체적으로 대하지 않고 시키기만 하면, 장애인은 시키는 대로만 하게 되고, 그러면 시설 밖에서도 사실 시설 같은 삶을 사는 거야.
시설에 들어가 살 때 정부와 지자체가 시설에 돈을 주는데, 그럼 나오면 나온 사람한테 필요한 돈을 줘야 한다. 필요한 대로 나한테 줄 정도가 돼야 한다. 그래야 내 맘대로 다 하지. 그 돈을 안 주는 게 말이 안 되지. 그건 ‘내 돈’이잖아. 내가 사는 데 필요한 돈. 근데 나한테 주면 안 돼? 시설을 유지하기 위한 돈들이 있잖아. 먹는 거, 그 건물, 옷도 입어야 되고 그리고 직원들 인건비도 있고. 그거 다 돈이 들어가잖아. 그럼 그건 내가 살아가기 위한 돈이니까 '내 돈, 나를 위한 돈'인 거지. 그럼 내가 자립하고 지역사회에 살면 돈을 줘야지. 내가 지역사회에 살 때 들어가는 집, 옷, 밥, 활동보조. 이 돈도 줘야 하는 거지. 원래 나한테 줘야 할 돈이니까 내 돈이고, 그러니까 나한테 줘야 한다. 원래 내 거니까. 빨리 나와서 나한테 주면 잘 살 수 있지.
해보기 전까진 모르는 거잖아
나는 해본 게 아예 없었잖아. 이때껏 50살 먹도록 내가 하고 싶은 거 못 해 봤잖아. 지금 시설에서 나온 사람도 여러 가지 다양하게 다 하고 싶잖아. 근데 하고 싶은데 돈이 없잖아. 그럼 그거 어떡해. 내가 직접 해보고 당해보고 해야 조금조금씩 실력이 크는데 아무것도 없어서 못 해 봤잖아. 용기가 안 생기잖아. 진짜 용기가 안 생겨. 아무것도 모르는데 뭘 알고 해. 벌써부터 힘이 쫙 빠지고. 그래서 나는 조선동이가 거기서 진짜 훌륭하다고 생각해. 직접 해보고 나와보니까 여러 사람들이 붙었잖아. 그래서 자기가 시도하고 그러면서 용기가 또 생기고 포기하지 않고 실패를 하든 성공을 하든 자기가 직접 당해봐야 된다. 그러면 실력이 조금조금 커진다. 그래서 나는 서울시가 시설에 돈을 주는 게 아니라 당사자한테 돈을 주면 좋겠는데. 물론 그것도 문제가 많긴 한 게, 당사자들이 돈 있으면 그냥 막 써버리잖아. 근데 그것도 하나의 연습이라고 생각해. 만약에 그 사람이 그냥 돈을 다 써버리고 다시 시설로 들어가? 그럼 다시 나올 때 똑같이 쓸까? 아니지. 그것도 다 연습이지. 연습할 시간을 줘야 하는데 그것도 안 주잖아. 왜냐하면 돈 주기 싫어서. 나는 그래서 연습이 많이 필요하다고 생각해. 바깥에 나와서 한번 살아보고, 또 들어가서 살아보고 하면 자기 나름대로 생각이 팍팍 생기잖아. 그럼 그때 나오면 제대로 살겠지. 한 번도 바깥에서 자기 혼자 사는 걸 못 해봤잖아. 그래서 연습이 필요하고 시설에 나와서 바깥에서 살고 이건 아니라고 또 들어가서 살아보고 그때 가서 생각이 팍팍 들고. 그럼 진짜 제대로 살 거라고 생각하는데. 나는 그래, 연습이 좀 필요하다. 안 된다고 말을 하지 말고 되게끔 만들어줘야지. 미리 안 된다고 하면 죽을 때까지 안 돼. 그래서 해보기 전까진 모르잖아. 한번 해보고 안 되면 안 되는 거고, 다르게 해보는 거고. 자기 스스로 딱딱 해야지 남들이 '된다, 안 된다' 하면 안 돼.
너는 잘 살아? 내가 미리미리 안 된다고 하면 좋아? 그래서 남이 안 된다 말을 하지 말고 해 보고 실패하면 실패하는 거고. 실패하면 또 들어가서 살다가 또 나오고. 당해봐야 돼. 물에 빠트리듯이 팍 밀어봤으면 좋겠어. 포기하든 살려고 버둥거리든 걔 맘이지. 자기가 선택하는 거지. "하지 마, 물에 빠지면 죽어"라고 미리 말하면 끝이야. 그냥 팍 밀어야 된다고. 그럼 어떻게든 살아야 하잖아. 그래서 나는 그게 좀 좋다고 생각해. 싸우는 것도 그래. 한번 당해봐야 다음부터 똑같은 방식으로 안 하지. 머리가 없으면 해봐야 돼. 그래야 금방금방 배워. 해보기 전까진 모르잖아. 영화제 슬로건이 타이밍이 진짜 조선동이랑 딱 맞는다.
기획작
김기영의 조각들
2026 | 다큐 | 40분 | 민아영
배리어프리 ⭕
시놉시스
2025년 6월 17일, 대구의 한 장례식장에서 무연고자의 장례가 치러진다. 장례식장은 발 디딜 틈 없이 사람들로 가득 차 있다. 고인은 1973년생 김기영, 상주는 ‘대구시립희망원 인권유린 및 비리 척결 대책위원회’. 기영 씨의 첫 기록은 1994년 6월 1일에 만들어졌다. 대구시립희망원에서 ‘1973년 6월 1일생 김기영’이라 정했다. 그는 거리 단속을 통해 시설에 입소한, 실제 이름도 생년월일도 알 수 없는 신원 미상의 장애인이었다. 누렇게 때가 탄 옷을 입고 온몸에 검게 멍이 든 채 발견된 그는 사라진 20년의 시간에 이어, 26년간 희망원에서 살아간다. 그리고 2019년 3월 27일, 긴 시설 생활의 종지부를 찍고 탈시설한다. 이삿짐은 단 하나의 박스뿐이었다. 자립생활주택에서 1년 6개월간의 삶을 시작하지만, 첫 건강검진에서 위암이 발견되고 치료 이후 폐렴이 이어지며 다시 요양병원으로 향한다. 그곳에서 4년을 보낸 뒤, 그는 생을 마감한다.
이 영화는 시설에서 함께 살았던 거주인들, 그를 돌봤던 시설 직원들, 탈시설 이후 자립생활을 함께했던 지원자들의 구술을 통해 김기영의 삶을 더듬는다. 중증의 장애가 있고 언어로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기 어려운, 작고 왜소한 몸, 그러나 유난히 큰 눈망울을 가진 사람 김기영.
혹독하게 홀로였던 한 사람의 삶을 따라가며, 김기영과 함께했던 이들의 일상과 기억을 통해 ‘사람으로 산다는 것’의 의미를 묻고 기록한다.
인권평
- 서한영교(24회 서울장애인인권영화제 집행위원)
시퍼런 여자, 왜소한 장애인, 그리고 삔
-20년, 시퍼런 여자, 부랑인
신원미상의 왜소한 여자가 대구 거리에 놓여있었다, 는 조각 하나. 1994년 경찰 단속에 의해 ‘부랑인’으로 이름 붙여져, 대구시립희망원에 수용되었다, 는 조각 둘. 수용 당시 여자는 “(엉덩이가) 시퍼렇고 등 뒤에 (멍으로)시퍼렇고, 다리도 (멍으로) 시퍼렇”게 짓이겨져 있었다, 는 조각 셋. 시퍼런 여자는 무려 이름이 있었다. 1973년생 김기영. 영화는 김기영씨를 기억하는 사람들의 말 조각들을 모아 시작한다.
-25년, 왜소한 여자, 장애인
희망원 내에 장애인거주시설이 설립되면서, “희망원에서 제일 힘든 얘들”을 한꺼번에 ‘장애인’으로 이름 붙여 몰아넣었다, 는 조각 하나. “여기 가서 때리고 저기 가서 때리고 고함을 지르고 그래 뭐, 조용할 날 없”는 시퍼런 폭력의 시간이었다, 는 조각 둘. “우리 기영이는 많이 맞았다. 질질질, 개 끌듯이 끌고 가서” 많이 맞았다, 는 조각 셋. 어떻게 해서든 자신의 목소리를 시설 밖으로 내보기 위해서 였을까? 김기영씨가 “잠을 자지 않고 벽에 머리를 부딪친다거나, 소리를 지르면서 우신다거나” 했던 것은? 그렇게 온 몸으로 시설 벽을 조금씩 허물어트린 걸까? 영화는 우리에게 직접 질문하는 대신, 직접 질문의 조각을 맞출 수 있게 한다. 의미를 간단히 봉쇄시키지 않고, 조각난 의미의 여백을 관객에게 넘겨주며 영화는 전진한다.
-1년 6개월, 깔깔깔 희망인, 김기영
2016년, 내부 고발을 통해 희망원 내 거주인에 대한 참혹한 인권유린이 드러났다. 시설 밖 투쟁이 시작되었다. “사회의 구성원으로서의 존엄함을 가지고 살 수 있”는 문제에 “아니면 말고라는 게 없”는 탈시설 투쟁을 통해 김기영씨와 동료들은 대구시 최초로 ‘희망인’이라고 불리며 지역사회로 나왔다. 신원미상 김기영, 부랑자 김기영, 무연고 김기영, 시퍼렇게 멍든 여자 김기영, 왜소한 여자 김기영, 장애인 김기영으로 산산조각난 희망인 김기영을 “상자 하나”에 모두 담아 지역사회로 나오기 시작했다.
영화에서 유일하게 이 부분에 삽화가 들어와 있다. 자립생활을 위해 필요한 물건들을 사기 위해 동료들과 근처 마트에서 산 머리 “삔”을 서로의 머리에 달고 너무 좋아 그만 깔깔깔, 웃는 장면. 감독은 왜? 어떻게 해서든 이 장면을 드러내고 싶었던 걸까? 희망원에서 탈시설해 ‘희망인’으로 불려졌던 김기영씨가 만난 희망이란 어쩌면 사소하고, 작고, 왜소하고, 반짝거리고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던 걸까? 산산조각나있던 김기영씨와 지역사회를 묶으며 희망인 김기영씨를 살아가게 하는 희망의 반짝거림을 드러내고 싶었던 걸까?
영화는 자꾸 관객에서 저마다의 질문을 조직하게 한다. 그것은 한결같이 김기영에 “관해 말하기”가 아니라 그 김기영씨의 “곁에서 말하기”라는 방식을 택한다. 자료와 기록으로 잘 남아있는 않는 김기영씨 ‘곁’을 맴도는 목소리와 사물들의 조각을 담아낸다. 감독이 영화의 구성을 지배하는 선형적 방식을 벗어나, 권위자의 위치를 벗어나, 그저 그 ‘곁에서 말하기’를 끝까지 고집하며 영화는 끝을 향한다.
-4년, 응급환자 김기영
인생 전체가 응급상황이었고, 비상사태였던, 김기영씨가 자립생활을 시작하고 얼마 되지 않아, 위암판정을 받고 위를 절제하였고, 또 얼마 지나지 않아, 급성 폐렴에서 패혈증으로 진행되면서 4년간 투병하다 응급이 생을 마감했다. 김기영씨를 추모하는 자리에서 자립생활을 지원했던 활동가의 추모편지 낭독을 길게 길게 길게 기록한다.
그리고, 영화가 끝나면 우리 모두는 관객이면서, 동시에 목격자이고 증언자로 남아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이 영화의 윤리와 정치가 작동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겸손한 목격자 민아영 감독이 “꾸역꾸역 손가락 하나를 건네는” 그 자리, “조금씩 기대며 세상과 우리와 적응하며 사는 삶의 관계”의 자리, 아무도 기억하려 들지 않는 죽음들이 “잊혀질까 두려”워 카메라를 드는 자리, “그저 당신답고 아름다운 나날을 보내셨으면 합니다”하고 기원하는 그 자리, 이 영화는 우리에게 그 자리로 초대하고 있다.
벽을 넘은 목소리
장호경 | 다큐 | 2025 | 60분
배리어프리 ⭕
시놉시스
2024년 11월 초, 장애인 거주시설 태연재활원에 살고 있는 한 거주인의 가족이 그의 갈비뼈가 부러졌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폭행을 의심한 가족들은 CCTV를 확인해보았다. CCTV로 확인된 1개월간의 학대 정황 850여건. 경찰 수사 결과 학대건수 346건, 피해자 29명, 가해자 21명. 단 한번의 의심이 꺼내놓은 진실. 닫힌 문 안에서 일상이 된 폭력은 CCTV를 통해 아무말없이 기록되었다. 이 영화는 울산의 대형 장애인 거주시설인 태연재활원에서 일어난 학대사건의 피해자와 그 부모의 목소리를 통해 대형 거주시설의 문제점과 사회적 대안을 찾아보고자 한다.
인권평
- 최한별(24회 서울장애인인권영화제 집행위원)
장애인 거주시설에서 일어나는 학대 사건이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벌써 수십년 째 반복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어떤 사람들은 ‘억울하다‘고 합니다. 시설에서 열심히 일하는 사람도 많은데, 소수 사람들의 잘못 때문에 다같이 욕을 먹는다는 겁니다. 아마 3년 전이었다면 울산태연재활원 직원들도 그렇게 말했을지 모르겠습니다.
이 영화의 배경이 되는 울산태연재활원은 “하버드”라고 불렸다고 합니다. 장애인거주시설에서도 최고 시설, 엘리트 시설, 그래서 장애인이 들어가려면 몇 년이고 대기까지 해야하는 곳이었기 때문이었다고 해요. 마치 미국 교외 주거단지처럼 꾸며져있는데다, 지역의 대단한 정치인이 설립한 사회복지법인이 운영하는 곳이라니, 장애인 자녀를 둔 부모님들은 자녀가 이 곳에서 사는게 더 좋은일이라고 굳게 믿었을 겁니다. 여기서 일하던 직원들도 그랬겠지요. 분명, 자부심을 가지고 성실과 애정으로 장애인을 ‘돌보는 일’에 최선을 다했을 겁니다.
하지만 우리 모두 알다시피, 실제로는 그러지 못했습니다. 경찰의 초기 조사를 통해서만 장애인 학대 피해가 총 346건, 가해자는 21명, 피해자는 22명이나 되는 것이 확인되었습니다. 영화에 나오는 고 박동수님은 태연재활원의 방임으로 결국 사망에 이르게 되었지만, 피해자 명단에 이름조차 올리지 못했고, 경찰이 미처 조사하지 못한 CCTV 사각지대에서 어떤 일이 더 일어났는지도 모르기 때문에, 아마 가해자와 피해자 수는 더 많을것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울산태연재활원’에 ‘대구시립희망원’, ‘인강원’, ‘인천해바라기시설’, ’광주인화학교‘ 등을 넣어 보아도 크게 다른 점은 없을 겁니다. 장애인 거주시설에서 발생하는 반복되는 폭력과 사망사건은 놀라울 만큼 닮아 있습니다. 사건이 알려질 때마다 우리 사회는 놀라고 분노하지만, 사건은 금세 잊혀지고 또다시 반복됩니다. 왜 그럴까요?
여러분은 혹시 ‘푸른 눈, 갈색 눈 실험’을 아시나요? 미국의 한 교실, 선생님이 말합니다. “푸른 눈을 가진 아이들은 갈색 눈을 가진 아이들보다 우월하기 때문에, 쉬는 시간에 운동장에도 먼저 나가고, 점심도 먼저 먹고, 앉을 자리도 먼저 선택할 거야”. 사실은 거짓말이지만, 선생님이라는 권력자가 가진 말의 힘은 엄청났습니다. 몇 시간 지나지 않아 푸른 눈을 가진 아이들은 갈색 눈의 아이들을 무시했고, 놀리고, 따돌렸습니다. 갈색 눈 아이들은 실수하고, 슬퍼하고, 소극적으로 변했습니다. 전날 까지만 해도 문제 없이 어울려 놀던 아이들이 선생님이 만든 서열에 적응해 적극적으로 “우월-열등” 역할을 따른 것입니다.
장애인 거주시설의 학대와 폭력 문제가 반복되는 것도 기본적으로 이 실험과 비슷합니다. 장애인 거주시설은 왜 생겨 났나요? 장애인은 사회에서 적응해서 살아갈 수 없는 존재, 비장애인만큼의 속도와 능력이 없는 존재, 심지어 비장애인에게 ‘걸리적거리는’ 존재이기 때문에 따로 모아 관리(또는 돌봄)하기 위해 시설이 만들어졌습니다. 마치 ‘푸른 눈은 우월하고 갈색 눈은 열등해’라는 서열처럼, ‘비장애인은 우월하고 장애인은 열등해’라는 공식이 시설을 세우고, 움직이는 원칙인 셈입니다.
밖에 있는 우리는 또 어떤가요? 시설에서 또 문제가 터져도, 우리는 마음 속으로 은근히 ‘장애인이니까, 시설이니까, 어쩔 수 없지. 일하는 사람들도 얼마나 힘들면 그러겠어?’라고 생각합니다. “장애인은 비장애인보다 열등하다”는, 사회가 만든 서열이 우리 마음 속에 깊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죠. 나아가 장애인이 말하는 (혹은 표현하는) 폭력 피해는 종종 “장애 특성”으로 여겨져 거짓말 혹은 착각이라고 무시되기도 합니다. 다시 말해, 우리는 장애인이니까 그런 폭력을 당해도 어쩔 수 없다거나, 장애인은 정서적 학대에 무딜거라 거나, 혹은 작은 일도 부풀려서 말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우리 자신의 차별에 ‘흐린 눈’을 하느라 시설 문제를 방치하고 있는 공범인 셈입니다. 애초부터 차별에 뿌리를 두고 만들어진 공간이 존재하는 한, 제아무리 착하고 선량한 사람이라도 장애인을 “부족한 존재”로 바라볼 수 밖에 없습니다. 시설은 존재 그 자체로 장애인과 비장애인을 가르는 차별적 선언인 것입니다.
그렇기에 영화의 주인공인 은혜, 명운, 진강을 비롯해 시설에서 나와 지역사회에서 살아가는 모든 분들은 우리 안의 차별을 들여다보게 하고, 반성하게 하고, 더 나은 사회로 나아갈 수 있게 하는 소중한 존재들입니다. 우리 사회가 그들에게 많은 빚을 지고 있습니다. 우선은 진실된 사과부터, 나아가 그동안 시설에서 부당하게 빼앗겼던 “친구를 사귈 권리”, “하고싶은 것을 할 권리”, “가족과 사이좋게 지낼 권리” 등을 다시 돌려받을 수 있도록 지원할 필요가 있습니다.
세 분의 자립을 진심으로 환영하고 축하하며, 공범자의 한 사람으로 깊은 사과의 마음을 전합니다. 말로만이 아니라, 아직도 태연재활원에 있는 분들, 아니, 한국의 모든 시설에 있는 사람들의 탈시설이 완료될 때까지 열심히 연대하고 투쟁하겠습니다.
시놉시스
박경석의 몸과 문종택의 손을 따라가는 영화는 지하철 속 박경석의 일상과 ‘무고한 사람들’에 대한 소동을 기록한다. 카메라를 든 문종택은 외면을 마주하며, 그들은 변하지 않는 세상 속에서 같은 싸움을 반복한다. 영화는 그들의 꿈을 함께 새기며, 그들의 싸움이 지닌 의미와 현재를 성찰한다.
스탠바이, 액션!
2025 | 다큐 | 94분 | 안창규
배리어프리 ⭕